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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부고니아' 줄거리/등장인물/전체 리뷰/쿠키 (스포일러 없음)

by Every.any.something 2025. 11. 12.

안녕하세요.

2025년 11월, 전 세계 영화계가 한 편의 영화로 인해 다시 한번 들끓고 있습니다. '더 랍스터', '가여운 것들'을 통해 현존하는 가장 독창적인 거장이 된 요르고스 란티모스와 그의 페르소나 엠마 스톤의 재결합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작품이, 2003년 한국에서 개봉했던 장준환 감독의 전설적인 컬트 명작 '지구를 지켜라!'의 공식 리메이크작이라면 어떨까요?

 

바로 그 상상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영화 **'부고니아' (Bugonia)**입니다. 원작의 기상천외한 상상력과 B급 광기가 란티모스 특유의 차갑고 기괴한 세계관과 만났을 때, 과연 어떤 혼종이 탄생했을까요? 스포일러 없이, 2025년 가장 문제적인 작품 '부고니아'의 줄거리, 인물, 그리고 이 리메이크가 갖는 의미를 깊이 있게 파헤쳐 보겠습니다.

[영화 '부고니아' 포스터]

1️⃣ 줄거리 : 2025년의 음모론, 사라지는 벌과 외계인 CEO

'부고니아'는 원작 '지구를 지켜라!'의 핵심 골격을 충실히 따릅니다. 하지만 그 시작점은 2025년 현재, 우리가 사는 현실의 불안감과 맞닿아 있습니다. 주인공 '테디'는 거대 바이오 기업의 물류창고에서 일하며, 부업으로 양봉을 하는 평범한(혹은 그렇게 보이는) 남성입니다.

 

그는 최근 전 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벌집 군집 붕괴 현상'(사라지는 꿀벌들)이 단순한 환경 문제가 아니라, 지구를 침공하려는 외계인들의 치밀한 계획의 일환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외계인'의 수장이 바로 자신이 일하는 거대 바이오 기업의 CEO, '미셸'이라고 확신합니다. 테디는 신경다양성을 가진 사촌 동생 '돈'을 설득하여, 다가오는 개기월식 전에 '미셸'을 납치해 그녀의 정체를 자백받고 지구를 구하겠다는 황당무계한 계획을 세웁니다.

 

영화는 이 두 남자가 거물 CEO '미셸'을 납치하여 자신들만의 지하실 아지트에 감금하면서 벌어지는 팽팽한 심리전을 그립니다. 이 지하실에서 '테디'와 '돈'은 '미셸'이 외계인이라는 증거를 찾기 위해 기상천외한 방식의 심문(혹은 고문)을 시작합니다. 과연 '테디'와 '돈'은 망상에 사로잡힌 미치광이일까요? 아니면 정말 지구를 구하기 직전의 영웅일까요? 그리고 '미셸'은 그저 무고한 피해자일까요, 아니면 정말 모든 것을 숨기고 있는 외계인일까요? 영화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 아슬아슬한 질문의 경계에서 관객을 현혹시킵니다.

2️⃣ 주요 등장인물 및 배우 : 원작을 비튼 세 개의 광기

'부고니아'의 핵심적인 변화는 원작의 '병구-순이-강사장'이라는 삼각 구도를 '테디-돈-미셸'이라는 새로운 관계로 변주한 데 있습니다.

  • 미셸 (엠마 스톤)
    :
    원작에서 백윤식 배우가 연기했던 '강사장' 역할이, 엠마 스톤이 연기하는 여성 CEO '미셸'로 변경되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성별 전환(Gender-swap) 그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미셸'은 란티모스의 전작 '가여운 것들'의 '벨라'와는 정반대로, 이미 사회 최상위 포식자의 자리에 오른 인물입니다. 그녀는 허영심 많고, 위선적이며, 교활한 엘리트 CEO 그 자체입니다. 엠마 스톤은 납치된 피해자의 공포와, 자신을 납치한 두 남자를 역으로 조종하려는 지배자의 냉철함을 오가며 '강사장'과는 또 다른 차원의 긴장감을 만들어냅니다. '두 남자에게 납치된 한 명의 여성'이라는 설정은, 원작의 B급 코미디 대신 란티모스 특유의 불쾌하고도 모호한 심리적 압박감을 극대화하는 장치로 작동합니다.
  • 테디 (제시 플레먼스)
    :
    원작의 '병구'(신하균 분)에 해당하는 주인공입니다. '병구'가 개인적인 트라우마(어머니, 연인)로 인해 탄생한 '순수한 광기'를 보여줬다면, 제시 플레먼스가 연기하는 '테디'는 2025년의 현실을 반영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거대 기업의 실험으로 어머니가 병들었다는 트라우마를 가졌지만, 동시에 소셜 미디어와 가짜 뉴스, 음모론에 심취한 '극단주의자'의 면모를 보입니다. '병구'의 광기가 짠하고 비현실적이었다면, '테디'의 광기는 지금 우리 주변 어디에선가 실제로 벌어지고 있을 법한 '현실적인 공포'를 자아냅니다.
  • 돈 (에이든 델비스)
    :
    원작의 '순이'(황정민 분) 역할을 대체하는 '테디'의 사촌 동생입니다. '병구'와 연인 관계였던 '순이'와 달리, '돈'은 '테디'와 남성적인 위계 및 동질감으로 묶인 인물입니다. 특히 실제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배우 에이든 델비스를 캐스팅하여, '돈'이라는 캐릭터가 세상을 바라보는 독특한 시각(신경다양성)을 '테디'의 음모론과 결합시켰습니다. 이는 '병구'와 '순이'의 애틋한 로맨스와는 전혀 다른, 기묘하고 예측 불가능한 시너지를 만들어냅니다.

3️⃣ 전체 리뷰 및 감상평 : B급 코미디를 지우고, '블랙'을 두 배로 채우다

'부고니아'는 원작 '지구를 지켜라!'에 대한 헌사이지만, 동시에 가장 란티모스다운 방식으로 원작을 해체하고 재조립한, 전혀 다른 영화입니다. 만약 원작의 '물파스' 고문이나 '아저씨... 누구세요?' 같은 황당무계한 B급 코미디와 유머를 기대했다면, '부고니아'는 당혹스러울 정도로 차갑고 씁쓸한 작품입니다.

 

란티모스 감독은 원작의 코미디 요소를 의도적으로 거세하고, 그 자리에 '블랙'의 농도를 두 배로 진하게 채워 넣었습니다. 원작의 가장 큰 매력이었던 시각적이고 물리적인 고문 장면들은, '테디'와 '미셸'이 벌이는 날카로운 '언어적 공방'과 '심리적 전쟁'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이는 란티모스의 전작 '더 랍스터'나 '킬링 디어'에서 보여준, 무표정한 얼굴로 서로의 심장을 찌르는 듯한 대화의 연장선입니다.

 

이 리메이크가 2025년에 만들어져야 했던 이유는 명확합니다. 2003년 '병구'의 음모론은 한 개인의 비극적인 트라우마가 빚어낸 '예외적인 광기'로 읽혔습니다. 하지만 20여 년이 지난 지금, '테디'의 음모론은 가짜 뉴스와 극단주의가 만연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그 자체'의 연장선입니다. 란티모스는 원작의 상상력을 빌려, 인간은 외계인이 침공하기 전에 스스로의 불신과 이기심, 어리석음으로 자멸할 것이라는 냉소적인 메시지를 던집니다. '부고니아'라는 제목(죽은 소의 시체에서 벌이 재생된다는 고대의 잘못된 믿음)처럼, 인류의 시체 위에서 과연 새로운 희망(벌)이 태어날 수 있을지, 혹은 그저 고요한 종말만이 남을지, 영화는 가장 란티모스다운 방식으로 관객에게 그 답을 떠넘기고 있습니다.

4️⃣ 쿠키 영상 유무(없음) : 완벽한 종말, 그 이상의 사족은 없다

결론부터 명확히 말씀드립니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부고니아'는 엔딩 크레딧 전후로 그 어떠한 쿠키 영상(포스트 크레딧 씬)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는 이 영화가 '지구를 지켜라!'를 리메이크한 방식과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생각할 때, 지극히 당연하고 완벽한 선택입니다.

 

원작 '지구를 지켜라!'가 B급 감성 속에서도 충격적이고 거대한 반전을 선사하며 이야기를 마무리했다면, '부고니아'는 인류의 어리석음과 자멸이라는 주제를 향해 냉소적으로 질주합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스포일러 방지)은 란티모스 감독이 내릴 수 있는 가장 차갑고도 신랄한 결론입니다. 이 묵직하고도 씁쓸한 '종말'의 선언 뒤에, 어떠한 유머러스한 보너스 컷이나 다음을 암시하는 '복선'이 붙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란티모스의 영화는 그 자체로 완결된 하나의 '우화'입니다. 그는 관객에게 친절한 위로나 명쾌한 해답 대신, 불쾌하고도 묵직한 질문을 안겨준 채 극장 문을 나서게 만듭니다. '부고니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쉽게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게 만드는 그 고요하고도 서늘한 여운이야말로, 란티모스 감독이 의도한 진정한 '엔딩'입니다. 쿠키 영상을 기다리며 그 완벽한 절망의 여운을 깨뜨릴 필요 없이,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부고니아'라는 제목의 의미를 다시 한번 곱씹어보는 것을 추천해 드립니다.